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리뷰 - ‘백 년의 밤’ 그 때 그 시절 서대문 그 동네 토박이들의 이야기

  • 2022-10-30 18:41
  • ACROFAN=류재용
  • jaeyong.ryu@acrofan.com
5호선 서대문역에서 내려 광화문 쪽으로 언덕배기를 걸어 올라가다 보면 강북삼성병원 옆에 구옥들이 문화공간으로 조성된 걸 볼 수 있다. 서대문의 정식명칭을 따 ‘돈의문박물관마을’이라 명명된 이 곳은, 과거 노포와 하숙집들이 들어차 있었던 그런 공간. 어떻게 이 비싼 땅에 빌딩 안 올리고 보존된 덕분에, 서울의 옛 정경을 여전히 보여줄 수 있는 흔치 않은 공간으로 남아 있다.

본래 ‘돈의문박물관마을’이 서울 근현대 모습을 체험하는 공간으로 시간여행 명소로 알려져 왔으나, 그냥 보이는 것만 여전할 뿐이지 딱히 과거를 회고하는 건 간간히 열리는 전시 정도였다. 인터넷이나 비정기적으로 개최되는 이벤트로 ‘이게 원래 뭐였다’ 알려주는 게 있긴 하나, 왜 이게 이렇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기회는 동행한 사람이 옛 이야기를 읊어주지 않는다면 사실 알기 어려웠다.

그래서 그런지, 추정하기로는 1960년대 생의 인생을 이야기하는 형태로 ‘돈의문박물관마을’의 시간상을 객(客)에게 들려주는 그런 프로그램이 최근 운영되고 있다. ‘백 년의 밤’이란 이름의 장소특정형 겸 관객참여형 공연이 바로 그것인데, 마을 전역을 배우와 함께 돌아다니며 그들의 연기에 틈틈히 참여하기도 호응하기도 하며 ‘돈의문박물관마을’에 얽힌 시대상과 인간군상을 마치 드라마와 뮤지컬을 보는 듯 함께 할 수 있는 계기를 참여자에게 제공한다.

▲ 돈의문박물관마을 중앙광장이 ‘백 년의 밤’ 이머시브 연극의 출발점이자 종착점이다. 각 씬이, 마을 곳곳을 관객과 함께 누비며 펼쳐진다.

▲ 극의 전반부는 등장인물들에 관한 스토리텔링의 영역이다. 과거의 향수를 자극하면서, 연기자들의 캐릭터를 차근차근 쌓아가는 과정을 보여준다.

▲ 신문배달로 어찌 엮인 박과 문 사이에 ‘통금’을 계기로 영이 들어온다. 박은 짝사랑이 깊어지는 단계를, 다른 둘은 눈이 맞아가는 단계를. 그런 흐름으로 이야기가 이어진다.

▲ ‘클럽’의 일식음차 ‘구락부’란 곳에서 관객이 직접 참여하는 장이 열린다. 그 어느 때보다 참여자의 호응이 중요한 순간.

▲ 옛스러운 연애가 마치 뮤지컬 씬처럼 연출되어 관객들에게 선사된다. 약간의 쑥스러움은 트럼펫 연주 선율로 가리우면서...

▲ 박은 서울올림픽 취재 차 방한한 외국인 기자에게 카메라를 배우게 된다. 문에게 받은 선물(?)은 이후에...

‘백 년의 밤’이 담은 이야기는 그 시절 사람들이 겪었을 법한 사는 이야기가 중심이다. 이야기는, 1970년대에 10대 신문배달부로 일하던 박이 그 시절 필름카메라가 있을 정도로 부자였던 문을 만나 문맹에서 벗어나는 게 시발점이다. 통행금지 있던 시절 경찰 피해 도주하던 영이 문과 눈이 맞는 가운데, 이를 다소 떨어져 보고 있던 박의 첫사랑과 그 결말까지의 과정을 그린 게 극의 전반적인 시놉시스다.

사람 사는 이야기가 사람 살던 동네에서 펼쳐지기 때문에, 각 씬에 해당되는 이야기가 마을 곳곳을 옮겨 다니며 진행된다. 2015년까지만 하더라도 노포들이 영업하던 멀쩡한 동네였던 관계로 예전 기억이 있는 이라면 극이 펼쳐지는 건물만 보고도 과거 무얼 했던 집인지 기억이 슬슬 들 정도. 그런데에서 젊은 청춘들이 청년기, 중년기를 거쳐 노년에 이르는 이야기를 풀어내기에 다양한 감상과 추억을 불러일으킨다.

이야기 자체는 2000년 전후 국내 공중파 드라마에서 많이 다뤄졌던 그런 재료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꽤 기시감 드는 건 기본이다. 아무래도 어둑어둑할 무렵, 쌀쌀한 바람 맞으며 마을을 누비는 흐름이어서 이야기가 어려우면 보는 입장에서도 부담갈 법한 상황이 전제이니 이리 짠 듯 싶다. 그런데 그 내용 자체가 품은 전제는 꽤나 무겁다. 아무래도, 40대 이상과 30대 이하 감상이 확연히 다를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.

극의 전반부와 후반부를 나누는 기준은 ‘문의 실종’이라는 이벤트다. 극장 앞에서 여친 찾으러 간 분이 뜬금없이 수십 년 실종. 40대 이상은 그 시절에 삼청교육대나 여러 이름의 근로대 등지로 군사정권이 사람 연행해 보내 없애버린 걸 기억한다. ‘범죄와의 전쟁’ 이전까지는 조폭들이 인신매매를 메인 비즈니스로 하던 시절인 건 덤. 때문에 70년대생까지는, 지금은 희화화된 단어인 ‘새우잡이 배’나 ‘다방 레지’, ‘망태 할아버지’ 같은 게 농담이 아니던 시절을 기억하는지라 꽤나 묵직하게 다가온다. 반면, 30대 이하는 그런 거 안 겪어봤을테니 자아찾기나 집안 사정 정도로 인지할 가능성이 있다. 나름, 세대차이가 나올 분기가 이렇게 하나 숨어있다.

▲ 실종사건 이후, 십 수년 세월이 흐른 뒤, 영은 패션 디자이너 직업을 갖고 생업을 이어간다. 물론, 영과 박 사이의 엇갈리는 감정선은 앞서나 지금이나 그대로라 보는 이 입장에선 안타까울 뿐.

▲ 영의 패션 스튜디오에서 무언가 세기말스러운 걸 관객들에게 입혀준다. 이는 극의 마지막 공간인 중앙광장에서의 런웨이를 위한 포석.

▲ 박 그 스스로의 인생은 사진작가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해 가는 과정을 그린다. 자기 이야기를 스토리텔러로서 관객과 나누며 스펙트럼이 가장 넓은 연기와 감정선을 보여준다.

▲ 고요한 가운데에서, 영과 문의 퍼포먼스는 여러모로 세대별 감상을 달리할 장치들을 품고 있다. 궁상부터 애틋함까지, 느끼는 바는 개인 소관.

▲ 모든 극이 끝난 뒤, 관객과 배우들은 그 위치를 바꿔 일종의 커튼콜(?)을 연출한다. 돈의문박물관마을 전역을 걸으며 70여분의 시간을 함께 한 이들 사이의 헌사랄까.

중앙광장에서 시작해 중앙광장에서 끝나는 ‘백 년의 밤’의 마지막은 관객과 배우들의 위치가 바뀐 세레모니가 장식한다. 다섯 배우와 스탭들의 팀플레이로 관객들을 이끌어 온 70여 분 간의 극은 모두가 함께 한 시간과 기억을 서로 축하하며 상상 속에 막을 내리는 마지막을 가졌다. 틈틈히, 또는 장소마다 사연을 서로 나누게끔 기획된 측면이 이 동네와 비슷한 곳을 살았던 이들에게 무언가 말을 하고 싶게 만드는 그런 묘미가 있다.

오는 12월 2일까지 매주 금요일과 토요일 밤 8시에 시작되는 공연이어서, 퇴근 후 저녁식사하고 들러 산책하는 겸으로 둘러보기 적당하다. 낮에는 도슨트 투어 프로그램으로 같은 장소를 거닐며 교육방송스러운 설명을 들을 수 있으나, 밤에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품었기에 그 이야기 속 상징으로 참여자 모두 각자 다른 감상과 이야기를 동행에게 풀어놓을 그런 측면이 있다. 그렇기에, 좀 쌀쌀한 날씨에 대한 대비 좀 갖추고 간다면 사실 ‘반 백년’ 이야기를 담은 ‘백 년의 밤’은 서울 그 어디에서도 만날 수 없는 참여형 시대극으로 잊지 못할 추억 하나 참여객에게 마련해줄 듯 싶다.

[공연정보]

명칭 : 백 년의 밤(The Night in Years)
기간 : 2022년 9월 30일부터 12월 2일까지
시각 : 매주 금/토 오후 8시
장소 : 돈의문박물관마을 일대
티켓 가격 : 인당 1만원
소요 시간 : 70분 (인터미션 없음)
관람 연령 : 전체관람가
출연 : 심효민, 권형준, 이경은, 황성현, 곽유경

작 및 연출 윤태식 / 안무 및 움직임 이주형 / 음악 이현진, 이중현 / 의상 이수원 / 분장 이동민 / 조연출 김별, 여지은 / 연주 유정근, 장푸른하늘, 이승호